조선역사의 기둥 - 조선 5대 궁궐
항상 우리 근처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깊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곳이 바로 서울 5대궁궐이다. 어렸을 적 부모님 손 붙잡고 멋모르는 마음에 들떠서 무더운 여름날에 서울에 있는 궁궐들을 놀러 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나는데,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5대궁궐을 견학하고 우리의 뿌리깊은 역사를 실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고등학생이 된 기념으로만 5대궁궐에 대한 답사와 조사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싶다. 내가 서울의 궁궐들을 돌아보게 되었던 이유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고종이 즉위한 시대는 우리나라가 자주적인 나라로써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일제와 다른 나라들로 인해 경제적 침탈과 유교적 수모를 당했던 시기이었다. 외국에는 제국주의라는 개념으로 식민지 확산이 극에 달하고 있었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겪으며 근대화하고 있었고, 나라 안은 매우 혼란스러워서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서울 5대궁궐에서 일어난 아관파천과 을미사변 등의 조선에 큰 기변을 가져다 준 사건들이 많았던 거의 조선 역사 상 가장 어지러웠던 때였기에 이 시기는 그 어느 시기보다도 탐구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을 했다. 5대궁궐과 고종의 즉위 기간과는 연관이 매우 깊은데, 정작 한국사를 배우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모르고 있던 중요한 진실과 조작된 우리의 전통을 궁궐들을 탐방하면서 유고한 한국의 문화를 이제는 정말로 지키고 싶었다.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서울 5대 궁궐, 그 안에 담겨있는 조선 유학자들의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전통 건축 방식들을 직접 견학함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해 나갈 것이다. 조이누리 기자단 최주연 |
■ 500년 조선 역사의 배경 지식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려왕조는 권문세족이 발호하는 가운데, 정치체제 약화, 왕권 쇠퇴, 밖으로는 이민족의 침입 등 혼란이 거듭되었다. 이러한 때에 이성계는 여진족, 홍건적, 왜구 등을 물리쳐 명성을 드높이며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조준과정도전 등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였다. 또 최영 일파를 처리하고 전제개혁을 결단한 후 실행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는 마침내 1392년 7월 16일 개성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건국했다.
태조는 민심의 혁신을 위하여 국호의 개정과 천도를 실행하였다. 먼저 국호는 고조선의 계승자임을 밝히고자 하는 자부심과 의무에서 조선으로 정하고, 이를 1393년(태조 2년) 2월 15일부터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 1394년 1월 농업생산력이 높고 교통과 군사의 집결지인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한양에 궁궐, 관아, 성곽, 4대문 등을 건설하고 한성부라 정하였다. 조선왕조가 건국 이념으로 내세운 것은 외교 정책으로서 사대교린(事大交隣), 문화정책으로서 숭유배불(崇儒排佛), 경제정책으로서 농본민생(農本民生)이다. 이에 따라 중국의 명에 대해서는 종주국의 명분을 살려주고, 일본과 여진에 대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또 유교를 정치, 문화, 사상계의 지도적 근본이념이 되게 하여, 교육, 과거, 의례를 유교적인 체제로 바꾸어 갔으며, 건국 초기부터 농업을 적극 적으로 장려하여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조선왕조는 왕권의 강화, 제도의 정비, 사회 구조, 대외 관계의 변화에 따라 단계적으로 발전하였다. 태조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는 왕권이 확립되고 국가체제의 밑천이 마련된 시기이다. 이 때에는 건국에 협조한 개국공신 등, 즉 훈구 세력이 실제권력을 장악하고 제도 정비를 주도하였다. 15세기말부터 지방의 사림세력이 중앙 정치에 진출하면서 몇 차례 사화를16세기에는 왕권이 약화되고 사회 체제가 변질되어 갔다. 이 시기 사림세력들이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방 강화와 대외 관계에 있어 효과적인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여, 왜란과 호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광해군에서 숙종의 즉위 기간 동안은 전쟁으로 흔들렸었던 사회 구조를 정비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예송 논쟁, 세자 책봉 문제 등에서 시작된 당쟁이 격화되어 정치는 여전히 매우 혼란스러웠다.
18세기에는 현실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의식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군사 등 여러 면에서 개혁이 추진되어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이와 더불어 산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유통경제도 눈에 띄게 성장해가며, 새로운 사회 건설을 이상으로 하는 학문이 일어나고 서민 문화가 성장하였다. 이는 영조와 정조의 통치 아래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외가의 의한 세도 정치로 정치 질서가 붕괴되었다.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에 의한 세도 정치는 왕권을 약화시켰고, 부정과 부패가 전국에 퍼지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국가 재정은 파탄에 이르고, 농촌 사회가 동요하여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 시기 밖으로부터는 천주교와 함께 유입된 서양 세력이 조선을 위협하였다.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침략과 저항으로 이어졌다. 안으로는 무능한 양반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민간 세력이, 밖으로는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 세력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고종을 대신하여 흥선대원군이 왕권을 강화하고 쇄국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으나,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갑신정변,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의 큰 사건들 속에서 동학 농민 운동, 애국 계몽 운동, 항일 의병 전쟁 등으로 우리 민족 모두가 힘을 국권을 지키고자 하였고,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라 고치고 황제를 칭하며 자주국가임을 선포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외세에 의존하는 명성왕후와 보수적인 집권층 때문에 대한 제국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흥정 대상이 되거나 일본과 열강 사이의 쟁탈의 대상일 뿐이었다.
일본은 1904년에 발생한 러일전쟁 이후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군사적 요지를 마음대로 점령하고 교통과 통신망을 장악하더니,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 이른바 고문 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서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인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상실, 즉 보호 정치를 실시하였다. 또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켜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 답사할 때 보았던 것과 배웠던 것
덕수궁(德壽宮):
덕수궁(德壽宮)은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거처였다. 하지만 갑작스레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해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1593년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되다가 광해군이 1611년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붙여 주었다. 그 후 광해군이 1615년 재건한 창덕궁으로 사는 곳을 옮기고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게 되는데, 이 경운궁이 현재의 덕수궁이다.
원래는 인화문이 덕수궁 돌담길 따라 제대로 위치해 있어야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소실이 되었는지 지금은 아주 이상한 형태로 그 문이 막혀져 있는 상태이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대한문이라는 동쪽에 위치한 큰 문이 남아있을 뿐이다. 대한문을 지나 조금 가다 보면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 금천교가 자리하고 있다. 금천교는 궁궐의 진입 부를 이루는 기본 요소 중 하나인데, 모든 궁궐에서 만나볼 수 있는 다리라고 한다. 이 다리는 궁궐의 영역을 외부와 구분 지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덕수궁이 훼손되고 인화문이 사라진 지금, 나머지 하나의 금천교도 사라져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금천교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가보면 고종의 침소와 접견실로 사용이 됬던 함녕전과 덕홍전이 보인다.
▲함녕전
함녕전은 고종의 침소로 사용된 곳인데, 이곳은 경운궁 대 화재 당시에도 가장 처음 불이 났던 곳이고, 폐위된 고종이 승하한 장소도 바로 이 함녕전이라고 한다. 덕홍전은 함녕전을 바라보고 왼쪽에 위치하고 있고, 이곳은 고종황제가 고위 관료들과 외교 사절들을 맞이할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함녕전과 덕홍전 사이의 계단을 넘으면 정관헌이 바로 보이는데, 이곳은 고종이 차를 즐기던 곳이었다. 이 정관헌은 서양 건축과 동양 건축의 조화를 보여주는 건물인데, 덕수궁 내부를 둘러보면 곳곳에 조선에 전통건축방식을 따르지 않고 부분적으로 섞여 있는 러시아식 건축물, 일본이 공사를 끝낸 석조전과 그 앞의 분수대를 지키는 세 마리의 물개까지 남아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국의 힘이 없을 때 타국에 의해 어떤 역사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을 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주는 것도 같았다. 준명당의 뒤쪽으로 나와서 석조전방향으로 향하다 보면 나무가 밀집하게 심어져 있는 휴식공간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선원전의 터라고 한다. 덕수궁 팜플렛을 살펴보다 우연히 1910년에 선원전 터가 현재 조선일보 본사 자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석조전
▲준명당
준명당 옆에는 현재 보수공사중인 서양식 건축물인 석조전이 보인다. 우리의 전통가옥은 목재와 흙을 이용해 지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당시에는 돌로 짓는 건축물은 매우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석조전이 고종의 완전한 의지로 지어진 것은 아니지만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석조전은 현재 보수중인 서관과 미술관으로 쓰고 있는 부분이 있다. 덕수궁 미술관 옆 광명문을 지나 대한문을 향해가다 보면 그 왼쪽에 중화문과 중화전이 보인다. 이곳은 바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들을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이곳에는 일품부터 구품까지 써져 있는 품계석이라는 돌이 일렬로 있는데 신하들은 자신의 품계의 맞는 돌 뒤에 줄을 섰다고 한다.
덕수궁은 대한제국 시대가 되면서 그 규모가 가장 크게 바뀐 궁궐로 고종의 자주적 의지가 가장 돋보이는 곳이라고 생각된다. 놀라웠던 점은 덕수궁은 다른 4대 궁들처럼 조선 초기부터 일정한 궁궐로써의 의미를 가졌던 곳이 아니라 고종이 일본의 내정간섭을 피하기 위해 경복궁 대신 덕수궁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번 덕수궁을 답사하게 되면서 일제와 대한제국과 고종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앞으로는 우리의 이런 아픈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경복궁(景福宮):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지어진 곳으로,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 종묘, 성곽과 사대문, 궁궐 등을 짓기 시작하는데 1394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395년에 경복궁을 완성했다. 조선 초기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경복궁은 궁궐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정치 상황이 안정되고 비로소 이곳이 조선 왕조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나는 답사를 하면서 두 가지 점을 크게 배웠는데, 우선 경복궁은 조선 유학자들이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건축물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물론 궁궐을 건축하는데 당연히 고심하면서 했겠지만, 그것이 단지 왕의 안위나 왕실의 화려함만을 위해 한 것이 아닌 유교적 정신과 예법, 그리고 실용성까지 모두 고려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번 답사를 하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다음으로 배운 것은 당시 학문의 깊이를 건축물로써 보여주는 이 경복궁이 일제에 의해 큰 손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총독부 건물을 없애고, 조작한 것만이 아니라, 과거 일제가 얼마나 치밀하게 조선을 침략했는지에 대해 알고 기분이 매우 나빴다. 특히 일제가 우리나라의 풍수지리설을 따르는 건축양식을 파악하고 경복궁을 일부로 훼손했다는 사실을 알고 더 화가났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을 때도 위치를 일부로 비스듬하게 기울여서 세움으로써 경복궁이 관악산과 이어지는 것을 막고 남산을 보게 만들었다. 왕이 사는 경복궁을 막고 총독부를 세워 치욕을 주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알고 보니 더 교묘한 계략이 있었던 것이다. 부도와 잔디에서도 일제침략의 흔적을 또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잔디가 깔려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우리나라의 고유의 건축양식에서는 잔디를 앞마당에 까는 법이 없다. 일본의 제국주의를 과시하기 위한 박람회가 끝난 후, 일제는 경복궁에서 기존에 있던 건물을 철거한 후 남은 빈 공간을 잔디, 부도 그리고 탑으로 매웠다. 이런 일본의 만행을 안내 직원들에 설명으로 들은 후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근정전
경복궁에 들어서게 되면 가장 먼저 영제교라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에서 관료들은 세속에서 묻은 탐욕 등의 더러운 것을 씻어내고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입궐하게 된다. 원래 이 다리 밑에는 금천이라는 물이 흘러 욕심을 흘려 보내는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금천의 담 위족에는 서수라는 상상의 짐승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조각물은 욕심을 버렸을 때 그 악한 기운이 영제교를 타고 올라오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가 조선을 점령하면서 이 자연스럽게 흐르던 물을 막았는데, 그것 때문에 아직까지 이 물이 다시 흐르지 못하고 있다.
금천을 건너 처음으로 나오는 건물은 근정전이다. 경복궁 내부는 크게 세 부분, 왕이 통치하는 공간, 왕실가족이 생활하는 공간, 신하들의 공간으로 나뉠 수 있는데 근정전은 왕이 통치를 하는 공간에 속한다. 근정전은 왕이 신하들과 함께 한 달에 네 번, 조참 의례를 치르는 곳이다. 신하들은 자신의 품계에 따라 설 자리가 순서대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예복을 갖춘 채로 의례를 치렀다고 한다. 근정전의 예식을 치르는 곳 바닥은 매우 울퉁불퉁한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관료들이 고개를 숙이고 서있을 때 햇빛이 반사되는 각도를 조절하여 덜 덥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하고 자칫하면 넘어질 수 있는 신발을 신고 있는 관료들을 위해 바닥을 거칠게 하여 마찰력을 높였다고 한다. 근정전 내부를 들여다보면 천장에는 용의 그림이 있고 용상 뒤에는 일월오봉도라는 병풍이 있다. 천장의 용은 왕, 일월오봉도는 왕권을 상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일월오봉도라는 그림에서는 해와 달이 있고 다섯 개의 산이 있는데 이것은 왕이 음양과 오행의 법칙을 따라 통치를 하겠다는 다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이 그저 최고 권력자로써 권위를 휘두르는 자가 아닌, 신하의 도리에 따라 왕의 덕과 의무를 중시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봉황이 새겨진 계단의 왕도 등이나 근정전 좌우에 위치한 솥 등이 있다. 근정전 옆에는 항상 물을 담아놓는 솥이 있는데 이는 화마라는 불 귀신을 쫓기 위한 것이라고 들었다. 목재건물이기에 화재가 발생하기 쉬워 이를 경계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근정전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세자가 살던 계조당이 나온다. 경복궁 안내를 받으면서 처음 들은 것인데 모든 세자궁을 동궁 또는 춘궁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세자궁은 항상 동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오르고 봄은 연초에 만물이 싹트는 때이기에 왕이 될 세자가 사는 궁을 동쪽에 지은 것이라고 설명을 받았다.
▲사정전
▲수정전
다시 근정전에서 앞으로 나가면 바로 사정전이라는 곳이 있다. 사정전은 왕이 매일 근무하는 곳이고, 건물이 세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왕은 계절마다 건물을 옮겨 다니며 근무를 했다고 한다. 사정전 천장의 운룡도에서 용은 왕을, 구름은 신하를 상징한다. 용과 구름이 어우러져 있는 이 그림에서는 어진 임금과 현명한 신하의 화합을 뜻하고 왕이 현명한 신하를 등용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사정전에서 왼쪽으로 이동을 하면 수정전이라는 신하들의 공간이 나온다. 수정전은 원래 집현전 이였고, 후에 국군기무처로 사용된 곳이었다고 한다. 수정전은 원래 수많은 건물들이 복도로 연결된 형태였지만 지금은 복도가 사라지고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경회루
수정전에서 앞으로 향하면 경회루가 있다. 본래 이 두 건물들 사이에는 담장이 있어서 신하들이 평소에 드나들 수 없게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왕이 신하들에게 연화를 베푸는 곳이었다고 한다. ‘경회’라는 말은 왕과 신하가 덕으로 만나야 나라에 경사가 온다는 듯에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답사하면서 이렇게 경복궁 내부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의미들을 찾아가보면 볼수록 조선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상으로 생각하고 그에 맞는 통치를 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을 했던 국가였음을 알 수 있었다. 경회루 안으로 들어서면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데, 건물의 기둥에 낙양각이 설치되어 안에 앉아서 밖을 내다볼 때 자연 경관이 물 흐르듯 이어지도록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경회루에서 오른쪽 뒤편으로 들어가면 왕실 가족의 공간인
강녕전이 나온다. 강녕전은 왕의 침전으로, 그의 동쪽에는
연생전이, 서쪽에는 경성전이 같이 있다. 연생전은 인을, 경성전은 의를 상징하는데, 이를 보면 왕이 인, 의로 만물을 거두고 생각할 때 나라에 복이 들어온다고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강녕전 뒤쪽에는 교태전이 있는데, 교태전은 왕비가 집무를 보고 생활을 했던 처소였다. 왕비의 처소 지붕은 보면 다른 건물들과는 다른 점이 눈에 띄는데, 바로 용마루가 없다는 점이다. 용마루라는 것은 지붕이 모이는 곳에 돌을 더 올리는 것인데, 왕비의 처소에만 용마루가 없던 이유는 왕비가 후계자를 낳는데 음양의 경계의 상징인 용마루를 없애 더 도움이 되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다.
▲아미산
교태전 뒤로 가보면 작은 동산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아미산이다. 아미산은 아담하지만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지금도 이렇게나 화려한데 당시에는 더 화려했다고 하니, 꽤나 아름다웠을 것 같다. 알록달록한 담장의 색깔과 예쁘게 조각된 굴뚝들에서 조금이나마 원래의 아름다움을 예상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여인들의 처소를 아름답게 꾸며주는 것은 평생 궁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미산에는 단순히 관상용으로만
쓰지 않았다. 경복궁이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을 잇기 위해 그 정 중앙에 일직선상으로 놓인 것이라 한다. 또 백두산의 기운이 이 아미산까지 이어짐으로써 조선의 왕자가 백두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게 하려는 이유도 있다.
교태전에서 더 동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자경전이 보인다. 자경전은 고종중건 때 새로 지어진 건물로써 조대비를 위한 건물이다. 자경전의 담장도 아미산의 담장과 마찬가지로 매우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는데, 뒤에 있는 담장에는 십장생과 여인을 상징하는 연꽃, 포도 등이 새겨져 있다.
자경전의 뒤쪽으로는 선원전, 즉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모시고 차례를 지내는 곳이 있었는데 일제가 해체해서 박문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방문해보니 그 곳에는 박물관이 지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특이하게 생긴 탑 하나가 있다. 이 탑은 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세운 것인데, 우리나라의 건축을 이용했기는 했다만 전체적으로 조화가 매우 불균형해 괴상해 보이기까지 한다.
더 깊은 곳까지 들어서면 향원정이 나온다. 왕과 왕비가 함께 휴식을 취하던 공간이다. 연못에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둥근 섬은 물론 경관을 더 보기 좋게 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물이 썩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고 한다. 연못가에 흘러나오는 물이 섬을 치게 되면서 흘러가는 것이다.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실용적으로 건축을 다룰 줄 알았던 옛날 사람들의 지혜란 참으로 놀라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건청궁
향원정의 북쪽에는 바로 건청궁이 있다. 이 건청궁은 1873년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며 만든 곳이라 한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살았던 곳이며 을미사변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을미사변도, 아관파천도 모두 국위를 바닥으로 떨어뜨린 사건들이었는데, 그런 일들의 발생지인 건청궁은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셈이다.
예전에 경복궁을 방문했을 때는 마냥 즐겁기만 하고 멋있다는 느낌만을 받았지만, 이번 답사를 통해 경복궁에 남아있는 일제의 흔적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또 경복궁은 상처의 흔적만이 아닌 조선의 유학자들의 깊은 뜻과 조선 성리학의 이상이 담겨 있는 곳 인만큼 앞으로 더 소중히 보존해야 할 의무를 느꼈다. 한국역사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던 좋은 계기가 되었다.
창경궁(昌慶宮):
창경궁(昌慶宮)은 서쪽으로 또 다른 5대 궁궐 중 하나인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5대 궁궐 중에 하나이다. 내가 충분한 배경지식을 쌓고 창경궁에 들어서자 우리는 창경궁의 한 가지 특징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창경궁은 다른 궁궐들과는 다르게 동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파악하고 근처에 계시는 안내 직원 분들에게 여쭤 보니 이 창경궁은 세종이 은퇴하신 아버지 태종을 위해 수강궁이라는 궁을 지었던 것이 성종 때 가 되어서 그 크기를 넓히며 다시 짓게 된 것이라고 하셨다. 이런 창경궁은 성종의 조모인 정희왕후와 생모인 인수대비, 숙모인 안순왕후의 주로 대비들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것이었다고 말씀해주셨다. 대비는 왕의 왼쪽에 앉는 것이 법도였던 조선으로서는 왕이 머물던 창덕궁의 왼쪽에 창경궁을 짓게 된 것도 동향의 궁궐을 지었던 것도 모두 창경궁이 왕을 위한 거처가 아니라 왕의 아내들을 위한 거처였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내가 눈으로 보며 느낄 수 있었던 창경궁의 매력은 바로 개울이었다.
▲홍화문
정문인 홍화문 앞을 보면 개울을 볼 수 있었다. 우리에게 창경궁이 왜 동향인지 설명을 해주셨던 선생님께서 개울의 용도를 말해주시니 그 개울이 그저 궁을 더욱더 멋지게 해주기 위한 개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개울은 풍수지리설의 기초인 배산임수를 위한 개울이었다. 배산임수란 앞에는 물이 있고 뒤에는 산이 있는 그야말로 ‘명당’ 자리를 의미한다. 창경궁의 뒤에는 북악산이,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게 함으로써 창경궁은 풍수지리설의 명당에 만족하는 터에 위치하게 만든 것이었다. 창경궁은 또한 역사적으로 슬픈 일이 일어났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창경궁의 문정전 앞 뜰이 바로 그 장소인데, 이 장소가 바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난 장소였다고 한다. 창경궁은 또 다른 슬픈 역사가 깃들여져 있다. 또, 창경궁은 일제강점기 때 창경원이라는 곳으로 바뀌어 동물원으로 신세가 뒤바뀌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50대의 어른 분들은 창경원이라는 곳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다. 이런 창경궁은 많은 아픔을 가지고는 있지만 많은 나무들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으로 자연 환경에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창경궁이 가지고 있는 아픔보다는 조선시대부터 쭉 가지고 있었던 자연과의 조화가 더욱 돋보인다.
경희궁(慶熙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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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慶熙宮)은 본래 경덕궁(慶德宮)으로 불렸다. 처음 창건 때는 유사시에 왕이 본궁을 떠나 거처하는 궁으로 지어졌으나, 궁의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동궐인 창덕궁에 대하여 서궐이라 불리고 중요시되었다. 이런 경희궁을 가기 전 많은 조사를 해보고 갔는데, 나는 경희궁에 도착한 후 주위를 둘러보며 조사를 하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은 경희궁도 다른 궁들 못지않게 뼈아픈 과거가 있다는 것이었다. 경희궁은 학교를 짓기 위한 일제의 만행 때문에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되었다고 한다. 일본에 의해 파괴되어 버린 경희궁은 숭정문, 숭정전, 태령전, 자정전, 자정문, 홍화문 등 몇몇 건물들만 복원되어 있어 5대궁궐 중에서는 가장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는 궁궐이었다.
▲숭정전
▲자정전
하지만 이런 궁궐의 초라함은 오히려 궁궐의 한적함을 보여주며 경희궁만의 멋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경희궁은 지금 숭정문 지붕 보수 공사로 인해 몇몇 부분의 관람이 제한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숭정전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옆 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경희궁 안의 많은 건물들이 복원되었지만 아직도 경희궁의 규모는 작은 편이다. 경희궁의 자정전은 봄 꽃으로 둘러싸여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경희궁의 가장 큰 매력은 가을에 나타난다. 가을의 단풍이 나뭇잎 하나하나에 다 물들었을 때쯤 경희궁을 가면 자연과 하나가 된 경희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궁의 동쪽에는 서울 역사박물관이 있어 역사에 관해 많은 것들을 알고 싶다면 경희궁은 최고의 궁이 될 것이다.
창덕궁(昌德宮):
창덕궁은 많은 임금이 사랑한 궁궐이었다. 정궁인 경복궁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고종 때 중건되기까지 273년 동안 역대 임금들이 정사를 보았던 곳으로 조선왕조 후기의 실질적인 정궁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창덕궁은 산과 접하여 지어졌고, 산세에 맞추어 건물을 짓다 보니 경복궁의 직선적이고 딱딱한 구조보다 다소 편안한 느낌이 강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돈화문
▲진선문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을 지나 금천교를 지나고 진선문을 지나자 인정문과 공식적인 국가 행사를 치렀다는 인정전이 나왔다. 인정전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용마루의 황금색 꽃무늬였다. 그 기능에 맞게 화려하게 장식을 해놓은 듯 했다. 이곳에서는 임금께 드리는 새해 인사, 외국 사신 접견 및 진연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치러졌다. 인정전의 실내장식을 보면 더욱 근대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커튼, 전구, 유리창, 마루 등의 요소가 전통적인 궁궐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니 신기하기만 했다.
▲선정문
▲선정전
그 다음에는 그 옆의 선정문을 지나 선정전으로 들어섰다. 선정전은 창덕궁 내 유일하게 청기와 지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보니 파란 지붕이 더 두드러졌다. 멀리서 봐도 한 눈에 파란색이라는 것이 보였다 이곳은 왕이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던 편전이라던데 내부를 보니 인정전보다 어좌가 조금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방석도 있었다. 확실히 인정전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다.
▲화정당 내부
▲화정당 외부
이어서 가까이에 있는 희정당에 갔는데, 희정당 앞마당에서는 아까 지나왔던 인정전이 한 눈에 보였다. 초기에는 이곳이 침실로 쓰이다가 선정전이 비좁아 편전으로 쓰이게 된 건물이라고 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선정당보다는 희정당이 훨씬 아름답게 보였다. 단청이 매우 화려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곳에 오기 전에 조사한 바로는 이 안의 구조가 개화기 때 새로 지은 것이라 서양식 구조가 많다고 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내부에는 서양식 샹들리에와 카펫뿐만이 아니라 개화기에나 볼 수 있는 의자와 책상이 있었다. 또한 현관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선정당과 희정당 사이에는 길이 하나 있는데 이 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계단 위에 선평문이 나타난다. 이 문은 대조전의 정문이라고 하는데, 다른 문과는 다르게 계단이 많은 것이 신기했다. 창덕궁은 순조가 기거했던 곳이라서 그런지 곳곳에 서양식 구조가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대조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조전 내부에도 희정당처럼 서양식 가구가 많이 있었다. 대조전에는 작은 후원처럼 뒤뜰이 있는데, 경복궁의 아미산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굴뚝과 정원석 등이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다. 이 곳은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대조전의 ‘대조’란 ‘큰 공업을 이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바로 왕실의 대통을 이을 왕자를 생산하는 것을 뜻하며 주로 왕비가 살면서 공적인 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대조전은 1917년의 화재로 인해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 옮긴 현재의 건물이라는 설명이 나와있었다.
▲낙선재
▲낙선재 담장
우리가 후원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낙선재 일원이었다. 후원으로 가는 길목 바로 앞에 낙선재가 있었다. 낙선재는 헌종 13년에 자신의 후궁인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건물로 헌종이 편안하게 책을 읽고 서화를 감상하며 한가롭게 머물렀던 곳이었다. 이곳을 처음 보았을 때는 이 곳이 실제로 왕이 살았던 곳임에도 궁궐이 아니라 양반의 집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궁궐의 화려함은 느끼기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독특한 문양이 군데군데 있었고, 낙선재 뒤쪽으로는 육각형의 건축물이 보였다. 이 건물의 이름은 육우정 평원루라고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낙선재 바로 옆에는 석복현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 또한 사대부의 집과 같은 느낌이다. 마지막으로는 석복현 옆의 수강재에 들렀는데, 이 곳은 정조 때 지어진 건물로, 덕혜옹주가 살던 곳이라고 한다.
후원은 왕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벼슬이 높은 신하라고 할지라도 왕의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엄중한 곳이었다. 이러한 후원은 왕과 그의 가족들은 휴식을 취하고 독서를 하며 학문을 연마하는 공간인 동시에 왕이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고 신하들과 시를 나누어 지으며 문예활동을 하였던 공간이었다. 또 인재를 뽑는 과거시험을 치르기 하고, 왕이 친히 농사를 짓고, 왕비가 누에를 기르는 체험의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부용정
▲연화당
창덕궁 후원을 들어서면 가장 처음 보이는 부용정의 ‘부용’이란 연꽃을 의미하는 것으로 부용정의 모양은 연꽃이 펼쳐진 모양을 표현 한 것이라 한다. 어수문 왼편의 영화당에서 본 주합루와 어수문, 그리고 부용지는 정말이지 한 폭의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시간만 있었다면 영화당에 걸터앉아 붓을 들어 영화당에서 보이는 풍경을 그려보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하였다.
어수문 위의 주합루는 정조의 지시에 따라 단청은 하되 검소하게 했으며, 정조가 직접 현판을 쓰고, 이름도 친히 지었다. ‘주합’이란 상하와 사 방면을 가리키며 이는 곧 천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천지 앞에 부용지가 있고, 그 안에 동그란 섬이 하나 있으니 이는 곧 동양의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이 조경에서 드러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주합루 1층에는 규장각이 있는데, 이는 정조의 뜻에 따라 역대 임금의 문장과 글씨 등을 한곳에 모시기 위해 만든 것이었지만 기존의 학문을 정리하고, 청나라를 통해 중국과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수집하였으며 초계문신제를 통해 조정 인사들의 능력을 향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임금과 세자의 교육활동인 경연까지 주관하여 당대 문예의 활발한 발전을 주도하였다는 안내사의 설명을 받고 나니, 경치만 아름다웠던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로 만든 특이한 불로문을 지나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애련지가 펼쳐진다. 애련지의 북쪽에는 정자 하나가 있는데, 연못에 가득했던 연꽃을 즐겨 감상했다 하여 그 이름이 ‘애련정’이다. 애련정은 기둥을 낙양각으로 장식하여 마치 액자의 그림을 보는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하나의 이어진 풍경을 3개의 액자로 나누어 각기 다른 풍경을 보는 것, 즉 공간을 새롭게 인식하는 한 방법이자 각각의 자연을 구체적으로 살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애련정
▲연경당
애련정을 지난 후에는 연경당과 선향재가 보였다. 이는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서 지은 집이라는데, 여기서는 왕이라는 본분을 잊고 지내라는 의미에서 단청도 없었다.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져 있어 왕비와 임금이 같이 살 수 있게 공간을 조합해 놓았다. 연경당 뒤로 보이는 것이 선향재인데, 도르래를 단 차향이 있어서 신기했다. 연경당 앞에는 의자들이 있었는데 이 의자들은 가끔 저녁에 음악회나 행사를 하는데 그때 관람객을 위해 만든 것이라 했다.
더 뒤로 가보면 존덕정이라는 공간이 나오는데, 강력한 왕권을 만들고자 했던 정조의 마음이 서려있는 곳이다. 존덕정 내부에 있는 ‘만천명월주인용자서’라는 제목으로 글이 있는데 이 글은 바로 정조가 쓴 글이다. 그가 자신의 의지대로 정치질서를 바로잡고 왕권을 확립한 후 자신에 찬 어조로 자호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존덕정 천장에 그려진 쌍룡은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창덕궁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품으면서 자연 속에 건물이나 정자, 연못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동양 조경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우리 조상들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이토록 세련되고 멋있다는 걸 알고 나니 참으로 행복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참고문헌:
Ø http://ask.nate.com/knote/view.html?num=1162448
Ø [네이버 지식백과] 경복궁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1.15, 마로니에북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371&docId=947709&mobile&categoryId=416
Ø 경복궁 안내 책자 published by 문화재청 in 2011
Ø 덕수궁 안내 책자 published by 문화재청 in 2011
Ø [네이버 지식백과] 덕수궁[德壽宮] (두산 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082062&mobile&categoryId=200000929
Ø [네이버 지식백과] 덕수궁 (한국 미의 재발견 - 궁궐 · 유교건축, 2004.11.30, 솔 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cid=371&docId=1632273&mobile&categoryId=416
Ø [네이버 지식백과] 창경궁 [昌慶宮] (두산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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Ø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 [朝鮮] (두산 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164666&mobile&categoryId=200001108
Ø 조선역사탐방-조선왕조가계도, 왕릉 및 궁궐, 문화재 등 소개
Ø [네이버 캐스트] 자연친화적 궁궐- 창덕궁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92&contents_id=4657
Ø [네이버 지식백과] 경희궁 [慶熙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terms.naver.com/entry.nhn?cid=1630&docId=566981&mobile&categoryId=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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