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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누리 기자단]이진형-②왕이라 불리지 못한 남자

조인어스코리아 2015. 2. 4. 10:57

왕이라 불리지 못한 남자

 

흔히 우리가 기억하는 조선의 왕들 , 태조. 세종대왕, 정조 등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를 빛낸 임금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는 왕이 아닌 군이라 불린 왕들도 있다. 왕이 죽은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붙이는 호를 가리키는 묘호에는 나라를 세운 공이 있거나 반정이나 국난 극복을 통하여 중단되었던 나라의 정통을 다시 세운 왕에게는 ‘조’를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 또는 덕이 출중한 왕에게는 ‘종’이라는 묘호를 추종하였다. 그러나 왕위에서 폐위된 왕에게는 ‘군’이라는 칭호를 붙이게 된다. 대표적인 왕으로는 연산군과 광해군이 있다. 연산군은 폭군으로 폭정을 일삼아 하던 이미지로 우리에게 떠오르지만 광해군 하면 딱히 폭군이라는 이미지가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왜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하였을까?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광해군은 왕세자로 책봉되고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떠난 반면 광해는 궁궐을 지키며 무능한 선조를 대신한다. 또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웠으며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큰 지지를 받게 된다. 허나 본래 질투심이 강했던 선조는 이러한 광해를 견제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1606년 인목황후가 영창대군을 낳자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새로이 책봉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결국 선조는 죽고 이후 1608년 광해는 조선 제 15대 임금으로 등극한다. 임진왜란의 결과는 너무도 참혹했다. 국토는 농경지로서 사용하지 못할 만큼 피폐해졌고 국력은 회복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처럼 보였다. 허나 이 상황에서 광해는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궁궐을 새로 짓도록 하였다. 이는 무리한 공사였지만 광해는 자신의 출신이 후궁의 아들이라는 것을 흠이라고 생각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더욱 애쓴다. 그러나 백성들의 삶이 굉장히 궁핍한 상황에서 광해의 무리한 궁궐 신설 계획은 신하와 백성의 반감을 샀다. 뿐만 아니라 중립외교로 인해 (물론 중립외교는 후금과 명 사이에서 안정을 도모하는 훌륭한 정책이었다.) 친명배금을 주장하던 서인들을 분노케 하였고 인목대비를 가두고 동생인 영창대군, 형인 임해군을 제거하면서 폭군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서인과 남인이 주도하여 1923년 인조반정을 일으켰고 광해는 1641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 중 사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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